120페이지 내용 : 정여립이 일찍 죽음으로써 적가문서賊家文書, 즉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이 역모 참여자를 찾아 심문하는 증거가 되었다.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친소를 말 하는 것이지 역모 참여는 아닌데 기축옥사는 그렇게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선 조의 심중이 크게 작용하였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로 아버지가 왕이 아니어서 정통성에 취약함을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자신의 안위에 예민하였다. 10월 초 모역이 고변되고, 그달 말에 창평 현 담양 의 생원 양천회의 상소 로 전주 출신 우의정 정언신과 그의 친형 이조참판 정언지, 남평 현 나주 출신 동인의 영수 이발과 그의 아우 이길, 백유양 등이 희생되었다. 그해 12월에는 동복 현 화순 유생 정암수의 상소로 무안 출신 정개청, 화순 출신 전라도사 조대중, 나주 출신 남원부사 유몽정 등이 옥사하였다. 이듬해에는 전라감사 홍여순의 장계에서 비롯되어, 진주眞州로 이거해 있던 최영경이 길삼봉으로 몰려 옥사하였다. 기축옥사로 희생된 인물이 문헌상에 확인되는 경우만 해도 232명에 이 른다. 실제로는 기축옥사 때 희생된 인물이 천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 그림 5. 진안 죽도 118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역할
121페이지 내용 : 여립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여 전주에 사는 동래정씨 족속들이 모두 쫓 겨나고 그 선조들의 전주 묘소는 타 지역으로 이장되었다. 남평의 광주이씨 이발・이길 형제는 노모와 이발의 어린 아들까지 죽임을 당하였다. 정여립 사건은 임진왜란 직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인물들이 희생 되었지만 사실로 단정하기에 여러 의문점이 있다. 그래서 정여립이 실제로 모 역을 도모했다는 주장과 서인들이 집정세력인 동인들을 밀어내기 위해 꾸며 낸 당쟁의 산물이라는 날조설이 맞서 있다. 정여립의 죽음에 대해서 모역이 사실이라고 보는 쪽에서는 자결이라고 하고, 모역이 날조되었다고 보는 쪽에서는 타살되었다고 주장한다. 대동계에 대해서도 모역을 사실로 인정하는 쪽에서는 손죽도에 출몰한 왜구를 물리칠 정도의 큰 세력으로 보고, 모역을 날조된 것으로 보는 쪽에서는 그렇게 거대 한 무사집단이었다면 어떻게 단 한 차례의 저항도 없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 사건에 대한 동인과 서인의 기록이 다르고, 실재설과 날조설 모두 풀 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있다. 따라서 사건의 진상을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기 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상황으로 볼 때 정여립이 모역을 도모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모역에 쓸 병기를 끝내 찾지 못했는 데, 병기도 없이 모역을 도모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모역이 실재했다고 보는 경우, 진안현감 민인백이 당시 상황을 기록한 「토역일기」를 대표적인 근거자료로 내세우지만 정황에 맞지 않는 면들이 있 다. 민인백이 정여립을 잡으러 다복동에 도착했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따라 서 「토역일기」에도 기록된 것처럼 정여립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볼 수 있는 상 황이 아니었다. 민인백은 서인으로 정여립모역사건을 평정한 공으로 평난공 신 2등에 책봉된 인물이다. 정여립이 모반을 도모하지 않았음에도 모역자로 몰린 것은 그가 뛰어난 역량을 지녔고 당시로는 위험할 수 있는 혁신적 사상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 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거기에 전라도의 변혁적 성향과 선조의 불안감이 작용해서, 분명치 않은 사건임에도 엄청난 희생을 초래하였다. 정여립 사건은 옥사가 만연되면서 중앙정계에서 동인과 서인 간의 주도 119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흐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