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책갈피 추가
페이지

122페이지 내용 : 권 정쟁으로 확산되어 많은 동인들이 정쟁에 휘말려 희생되었다. 이 모역사건 으로 전라도는 중앙정계에서 그 위상이 약화되고, 향촌사회에서 사림들 간 에 심각한 분열이 지속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선조대 중앙정계의 주도적 위치에 섰던 호남사림은 그 실체가 불분명한 정여립 사건으로 이후에 내리막길을 걸었다. 고려시대 실체가 불분명한 훈요 십조로 인해 중앙정계에서 전라도 세력이 약화되었고, 조선시대에 또다시 실 체가 분명치 않은 정여립 사건으로 전라도는 중앙정계에서 밀려나고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정여립 사건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호남차대론이다. 정여립 사건으로 전라도가 반역향이 되어 이 지역 출신들의 중앙진출이 저애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정여립 사건으로 인한 호남차별은 없었다는 견해가 제기되 고 있다. 호남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은 물론 없었다. 하지만 정여립 사건으로 호남사림들이 중앙진출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17세기 이후 전라도 출신의 문과급제자 감소는 이를 말해 준다. 호남사림의 문과 진출이 감소한 데에는 서울 경화자제京華子弟들의 관직 장악과 충청세력의 약진에도 요인이 있지만, 정여립 사건 후 전라도에 대한 중앙정부의 견제가 작용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전라도의 역사를 저항과 차대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정여립사 건도 그런 차원에서 해석되었다. 그러나 전라도의 저항은 상대에 대한 저항 이 아니라 삶의 높은 질을 추구하는 변혁적 성향을 지닌 것이다. 소외와 차 대는 새 사회를 열어갈 수 있는 전라도의 저력에 대한 중앙정부의 견제적 성 격을 지닌다. 전라도 지역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호남의 특질을 저항이 아 니라 변혁으로, 차대가 아니라 견제로 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여립 사건도 반역과 차대의 논리에서 벗어나 전라도의 변혁적 성향을 담은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120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역할

페이지
책갈피 추가

123페이지 내용 : 6. 나라와 역사를 지킨 전라도 가. “약무호남 시무국가”, 임진왜란 때 수호된 전라도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수호된 지역이 전라도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약 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즉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고 하였으며, 왜란을 겪은 보성 출신의 사림 안방준은 ‘호남의 보존은 의병의 봉기에서 말 미암은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 은 곡성 옥과 의 성균관 학유 유팽로와 남원의 전前 주부 양대박이었다. 유팽 로는 문과급제자로 부모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다가 4월 20일 순창에서 기병하였다. 이어 김천일이 나주에서 기병하여,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첫 번째로 북상하였다. 광주 출신 고경명은 유팽로, 양대박 등과 함께 담양에서 회맹하 여 호남 최대의 의병 6,000명을 이끌고 두 번째로 북상하였다. 이보다 조금 늦게 고부 정읍 의 김제민이 전주 삼례에서 창의하였다. 그래서 김천일을 일운 장, 고경명을 이운장, 김제민을 삼운장이라 하였다. 일본은 4월에 조선을 침공하여 한양과 평양을 점령하고, 6월 하순에야 전라도 공략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금산성을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무주, 용담, 진안을 장악하고 웅치와 이치 두 길로 나누어 호남의 수부首府 감 영이 있는 곳 전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이 전주와 진안의 경계 인 웅치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웅치전에서 정담이 순 절하는 등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했지만, 왜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혀 전주 성을 수호하고 전라도를 보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전주성은 이정란이 수성장이 되어 지켰다. 이치는 진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도절제사 권율이 진을 치 고, 황진은 최전방에 진지를 구축하여 대접전을 벌였다. 의병장 황박은 이 전 121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흐름

탐 색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