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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페이지 내용 : 배출한 지역이 전라도라는 점이고, 전라도 실학자들은 실용적인 학문에 지대 한 관심과 상당한 실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논농사에 필수적인 수차, 그 가운 데 물을 아래에서 위로 품어 올리는 양수기 연구・개발에 뛰어든 학자가 적지 않았다. 천체 관측과 항해술의 바탕이 되는 천문학・조선술, 측량・회계와 과 학의 기본이 되는 수학, 관념세계를 현실세계와 연결시켜 주는 지도학・역사 지리학 등의 일상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학문에 깊이 있는 연구를 행하여 독 자적인 경지로 발전시켰다. 조선전기의 불교정책은 불교의 세속적 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에 따라 사찰에 딸린 토지와 노비 및 승려를 줄이고, 종파와 사찰 또한 축소시 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11개 종파를 7개 종파로, 다시 선종과 교종 2개 종파로 통폐합하면서 36개 사찰이 각 지역을 관리하는 본산 체제로 개 편하였다. 전라도에는 선종에 구례 화엄사와 태인 흥룡사, 교종에 창평 서봉 사와 전주 경복사가 선정되었으나 1년 이내에 화엄사는 순천 송광사로 대체 되고, 서봉사와 경복사는 각각 다른 지역 사찰로 교체되었다. 조선후기의 불 교는 국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 했는데, 도 총섭 제도를 통해 토목공사를 부담하였고, 사유재산・상업활동을 확대하여 재원을 확충하였다. 그 결과 전라도 사찰이 16세기에 238개로 파악되었던 것이 후대에는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 가운데 현재까지 전통 사찰로서의 가 람을 유지하고 있는 사찰로는 위봉사, 백양사, 송광사, 선암사, 화엄사, 대흥 사, 금산사, 선운사, 안국사, 보림사, 태안사, 도갑사, 백련사, 무위사, 만연사, 향림사, 흥국사 등을 들 수 있다. 조선후기 불교계는 이전까지 있었던 선종이나 교종의 종파적 구별은 없 었지만, 임진왜란 의승義僧의 상징이었던 서산대사 휴정의 문도를 자처한 청 허계와 병자호란 의승장이었던 각성의 문도를 자처한 부휴계를 중심으로 발 전을 이루어 나갔다. 청허계가 전국적으로 문도들이 번성했던 데 비해, 부휴 와 그 제자 각성은 순천 송광사를 거점으로 하여 전라도를 근거지로 활동하 였기 때문에 호남에서는 부휴계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반면에 전라도 청허계 는 해남 대흥사를 거점으로 하였는데, 대흥사 경내에 표충사가 건립되어 휴 134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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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페이지 내용 : 정과 함께 제자 사명 유정, 의승장 뇌묵 처영이 향사되었다. 양란 때의 의승 활동을 한 승려를 중심으로 형성된 각 계파는 자신들의 교육을 위해 강원을 운영하였다. 승려들은 강원에 입학하여 그곳에 비치된 불서를 통해 사미과 에서부터 시작하여 대교과에 이르기까지 대략 1012년에 걸치는 수학 기간 을 보냈다. 강원에서 배출된 승려들은 유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 을 쌓았다. 이러한 강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전라도에서 활동한 부 휴계의 백암 성총인데, 그가 간행한 『화엄경소초』는 조선후기 화엄학 유행 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조선시대 전라도에서 간행 된 불서는 대략 478건으로 파악되는데, 17세기에 가장 많았고 불교 민중화 비중이 높았다. 특히 송광사의 불서 간행이 많았다는 점은 강학 활동이 다른 사찰을 압도할 정도로 활발하였다는 점과 맥을 같이 하는 사실이다. 건물 유지와 의례 수행 및 일일 생활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재력이 소요 되지만, 조선 정부의 정책에 의해 사찰의 경제기반은 약화되어 갔다. 각 사찰 은 경제기반을 회복하기 위해 자구책 마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방 법으로는 왕실의 원당이 되는 길이 있었고, 자체 수입원을 두는 길도 있었다. 자체 수입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종이 공장인데, 닥나무를 재배하여 공장 에서 종이를 생산하여 상인이나 시장에 팔았지만 그 반대급부로 관청에서 공납용 종이를 배정하여 납품하기도 하였다. 특히 종이 생산지로 유명한 남 원은 관내 5개 사찰에서 종이를 납품하였는데, 2개 사찰이 너무 무거운 짐을 견디지 못하고 폐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능주 현재 화순 쌍봉사도 1 년에 1500권의 종이를 부담할 정도였다. 또 다른 사찰 수입원으로는 승려 개 인의 사유전답도 있었다. 신자들의 헌납이나 개인적인 매입에 의해 형성된 승려 개인 전답이 사찰에 양도되었다. 대흥사의 경우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대둔사답고』와 『대둔사중답고』라는 문서에 토지 소유주와 면적, 토지를 사고 판 내역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무려 438마지기의 토지 내역이 기록되어 있는 또 다른 문서도 있다. 영광 불갑사, 남원 실상사에도 보 유한 토지 내역을 기록한 양안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대흥사는 대동청 또는 보사청 등의 전담조직을 두어 체계적으로 재원을 마련하고 운용하였다. 보 135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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