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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페이지 내용 : 1. 조선후기 내우외환의 시련과 대응 가. 기상재해의 발생과 삼정의 문란 조선후기에는 기상재해의 발생과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피폐하여졌다. 특히 1876 고종 13 1877년 고종 14 에는 한재와 수해가 이어져 이른바 ‘병정대기근丙丁大飢饉’을 초래하였다. 그 피해는 전국에서도 전 라도가 가장 컸으니, 도내道內의 56개 읍 중 재해등급이 낮은 초실읍稍實邑은 1876년 6개, 1877년 18개에 불과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구휼금을 지급하고 어사를 파견하였으며, 지방에서는 기 우제를 지내는 한편 성금을 모으고 비축한 곡식을 푸는 등 수습에 나섰으나 근본적 처방은 되지 못하였다. 농지는 황폐화되어 황무지가 속출하였으며, 전 라도의 경우 1886년과 1888년에도 흉작이 들어 농민들은 각지로 유랑하였다. 이 같은 기상재해와 함께 백성들을 괴롭힌 것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 還穀 등 삼정의 문란이었다. 지방 군현에서는 세금의 유예나 면제를 감영에 제5장 근대 146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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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페이지 내용 : 요청하였지만 수령과 향리들은 여전히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참다못한 전라 ・경상・충청의 농민들이 1862년 철종 13 봉기하였다. 1868년 고종 5 에는 강진 병영에서 병란兵亂이 계획되었으나 악천후로 무산되었다. 이듬해인 1869년 고종 6 광양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하였고, 나주에서는 1880년대에 크고 작 은 ‘민요民擾’가 이어졌다. 이같은 기상재해와 가렴주구는 농민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고,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였다. 여기에 개항 직후인 1876년 고종 13 1877 년 고종 14 에는 쌀값이 폭등하고 땅값은 하락하였다. 정부에서는 방곡령을 실 시하는 등 대책에 부심하였으나 대부분 고식지계姑息之計에 그치고 말았다. 나. 외세의 위협과 위정척사론의 대두 이 시기에는 외세의 침탈도 이어졌으니,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는 조선의 위기감과 서구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켰 다. 여기에 일본에서는 1870년대부터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하였고, 정부는 쇄 국정책으로 강경하게 맞섰다. 장성의 노사 기정진은 상소를 올려 위정척사衛正斥邪와 함께 내수외양內 修外攘을 주장하였고 고창의 정하원도 이를 계승하였으며, 화서 이항로와 김 평묵의 전라도 제자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이들 노사학파蘆沙學派와 화서학파 華西學派 외에 전우의 문인들인 간재학파艮齋學派도 전라도 위정척사론 확산에 일조하였다. 일제의 강점 이후 이들은 자결하거나 은둔하여 후진을 양성하기 도 하였고, 민족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는 등 전라도 위정척사운동의 전 통을 이어 갔다. 다. 이양선의 출몰과 거문도사건 조선후기에는 ‘이양선異樣船’이라 불리는 서양함선이 자주 출몰하여 조 선의 해안을 측량하였다. 1787년 정조 11 에는 프랑스 함선이 제주도와 울릉 도를, 1797년 정조 21 에는 영국 함선이 부산항을, 1816년 순조 16 과 1832년 순조 32 에도 영국 함선이 서해안을 탐사하였다. 147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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