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페이지 내용 : 서구 열강은 특히 거문도에 주목하였다. 거문도는 남해안과 제주도 사이 에 위치하고 대부분 주민이 어업과 농업으로 생계를 잇는 평범한 섬이었으나,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은 일찍부터 이 섬에 주목하였다. 영 국, 러시아, 미국 등은 18401870년대 수시로 거문도를 탐사하였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이 섬에 관심이 없어서 관리도 파견하지 않았으며 정확한 위치 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구열강 중 특히 영국이 거문도에 큰 관심을 보였다. 1845년 헌종 11 , 1855년 철종 6 , 1859년 철종 10 , 1863년 철종 14 , 1875년 고종 12 연속으로 거 문도를 탐사한 것이다. 영국이 거문도에 주목한 이유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 기 위한 군항軍港이 필요해서였다. 그러던 중 1885년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자 영국은 전격적으 로 거문도를 점령하여 조선을 둘러싼 열강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러시 아와 조선 정부의 항의, 청국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버티던 영국은 1887년에 야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이 사건은 영국과 러시아의 영토 확장 경쟁의 결과였으며 그 수습 과정 에서 중국의 영향이 커지면서 조선에 대한 간섭도 강화되었다. 그리고 조선중 립화론朝鮮中立化論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은 국제법에 따 른 세력균형과 제국주의의 침략적 속성을 약간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라. 동학의 창시와 동학농민전쟁의 확대 이 같은 내우외환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전 라도 일대로 확대되었다. 창시자인 최제우가 1864년 고종 원년 처형되자 흩어 졌던 동학교도들은 최시형을 중심으로 1892년 고종 29 교조신원운동敎祖伸 冤運動에 나서는 등 점차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러던 중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견디지 못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1894년 고종 31 전봉준의 주도 아래 봉기함으로써 시작된 동학농민전쟁은 태인의 김개남과 무장의 손화중 등이 주도한 백산봉기를白山蜂起를 기점으로 이내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농민군은 고부의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 148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역할
151페이지 내용 : 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정읍, 흥덕, 고창, 무장에 이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때까지의 농민전쟁은 반봉건反封建의 성격이었다. 하지만 농민봉기는 청국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출병하는 빌미를 제공하여 청일전쟁을 촉발시켰다. 정부 측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였으나 지도부는 나주를 제외한 전라도 53개 군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폐정 개 혁에 착수하였다. 개혁의 요강은 다음과 같은 12개 항목이었다고 하나 후대 의 위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숙혐宿嫌을 씻어내고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벌할 것. 3. 횡포한 부호들을 엄벌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부호들을 엄벌할 것. 5. 노비문서를 불태워 버릴 것. 6. 칠반천인七般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을 벗 어버릴 것. 7. 청춘과부는 개가를 허용할 것. 8. 무명잡세는 일체 거두지 말 것. 9. 관리의 채용은 지별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일본과 내통하는 자는 엄벌할 것. 11.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케 할 것. 그러나 이 같은 농민군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집강소의 활동도 이내 벽에 부딪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 하자 농민군이 다시 봉기하게 된 것이다. 이제 농민전쟁은 반외세反外勢의 성격 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이겨내지 못한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처럼 동학농민전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이 내세웠던 주장은 이후 각종 개혁안에 반영되었으며,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교세를 신 장시키면서 그 명맥을 이어 갔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였던 동학농민 149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흐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