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페이지 내용 : 전쟁의 경험과 정신은 전라도의 천도교가 1919년 3・1운동을 주도함으로써 계승되었다. 2. 한말 일제의 국권 침탈과 전라도인의 저항 가. 계몽운동의 전개와 국채보상운동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진출로 시대의 흐름에 맞는 자강개혁自强改革의 필 요성을 느끼게 된 인사들은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896년 부터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운동이다. 전라도는 독립협회운동과 직접적 인 관련이 없으나 서재필과는 간접적인 연관이 있다. 독립협회를 설립한 서재 필의 집안은 충남 논산 출신이나 그는 1864년 외가가 있는 보성에서 태어났 기 때문이다. 현재 보성에는 그의 생가와 서재필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전남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는 18901900년대 광주, 순천, 영광, 무안, 장성, 담양, 진도, 나주 등지에 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11년 3월 현재 전 남의 사립보통학교는 15개, 일반학교는 27개, 종교학교는 9개였다. 전북에서 는 천주교에서 공소학교를 다수 설립하였다. 그리고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미국남장로회의 선교거점 station 이 세워진 지역에는 예외 없이 근 대식 남・녀 학교가 문을 열었다. 또 1900년대 전북에는 10개, 전남에는 14개 이상의 야학이 운영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전라도의 계몽운동단체로는 호남학회와 대한협회 전라도 지회가 있다. 서울의 전라도 출신 인사들이 1907년 결성한 호남학회는 『호남학보』 간행, 법학강습소 설치, 측량학교 설립 등의 활동을 벌였으며, 전주지회를 설치하 였다. 전남지회 설립도 계획하였으나 실제 설립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밖에 1906년 창립된 대한협회의 전라도 지회는 전북의 전주 등 12개 지역과 전남의 광주 등 9개 지역에 설치되었다. 한편 19071908년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참여 규모만 놓고 150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역할
153페이지 내용 : 본다면 한말 최대의 계몽운동이자 민족운동이었다. 전라도에서는 비교적 일찍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조직되었다. 그 최초는 1907년 2월 전북 정읍에서 조직된 단연회斷煙會로 짐작된다. 이어 3월 전라도 인사들은 전주와 광주에 대동광문 회大同廣文會 지회를 조직하고 ‘국채보상의무소國債報償義務所’ 또는 ‘상채의무회償 債義務會’라 불린 단체를 설치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추진하려고 계획하였다. 참여 규모를 보면 전북에서는 전체 28개 군郡 중 18개 군에서 19개의 단체가, 전남에서는 전체 32개 군郡 중 16개 군에서 22개의 단체가 확인된 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더 많은 지역과 단체들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모 금 실적을 보면 전북에서는 13,787명이 참여하여 9,293원을, 전남에서는 20,117명이 참여하여 124,753원을 의연한 것으로 집계된다. 이는 신문기사 등에 근거한 것이어서 실제 실적과는 차이가 날 수 있다. 전라도는 서울 및 경기도・충청도・경상도에 비하여 농업의 비중이 높은 대신 상공업이 발전되지 못하였으며 그만큼 주민들의 경제적 수준도 열악하 였다. 또 어느 지역보다 동학농민전쟁과 항일의병투쟁이 활발히 펼쳐졌기에 일제의 탄압과 주민의 불안도 우려할 만한 상태였다. 이 같은 난관에도 불구 하고 이 정도의 실적을 보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전라도 국채보상운동도 다른 지역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국채보상단체를 조직한 주도인물들은 전・현직 관리나 유생층이 다수였고,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에 구애 없이 각계각층이 참여하였으며, 가족, 문중門中, 직업, 학교, 향교, 직장, 계契, 종교 단위의 모금활동이 확인된다. 물론 개인 차 그림 1. 전라도 국채보상의무소 기사 『대한매일신보』 1907. 3. 19. 151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흐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