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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페이지 내용 : 다. 농촌진흥운동의 실상과 허상 1920년대 후반 세계대공황 이후 일제는 식민지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 하여 19321940년 전국 농촌을 대상으로 농촌진흥운동農村振興運動을 전개 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은 물질생활의 안정이 목표였지만 정신생활의 개조에 도 역점을 두었다. 농촌의 피폐를 조선 농민의 나태 탓으로 돌리며 근검절약 과 금주금연, 미신타파, 부업장려 등을 통한 자력갱생自力更生을 강조하였다. 1935년부터 시작된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 역시 농촌진흥운동과 맥락을 같이 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된 농가경제갱생계획農家經濟更生計劃의 목표는 식량충실, 부채상환, 현금수지개선 등이었으며, 그 추진을 위한 부락 과 농가가 선정되었다. 전북의 경우 1933년 32부락 816호에서 1939년 452 부락 9,083호, 전남의 경우 1935년 71부락 159호에서 1939년 736부락 17,262호로 매년 증가하였다. 이들 부락과 농가는 일제의 지원을 받아 초기 에는 사정이 호전되는 듯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치행정官治行政의 한계 를 드러내며 점차 실적이 감소하였다. 라. 총동원체제 하 강제동원과 수탈의 강화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조선의 상황은 전쟁을 위한 총동원체제總動員體制로 전환되었으며, 1938년 국민정신총 동원운동國民精神總動員運動과 1940년 국민총력운동國民總力運動이 강요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들의 삶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다. 1942년 일제는 전라도에서 민심을 파악하였는데, 공출과 배급, 전쟁에 따른 고통과 불만이 조사되었다. 19431944년경부터는 일제의 패망에 대한 소문이 유포되었다. 그 같은 지역은 전라도의 경우 전북의 금산, 김제, 군산, 진안, 전남의 광주, 목포, 영 암, 장성, 함평 등지였다. 또 1938년 부안 공립농업실습학교, 1939년 광주 공 립송정리공업실습학교, 1941년 고흥 사립농업실습학교 등에서는 강제동원 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나서기도 하였다. 인적 수탈도 날로 심화되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 명부」에 따 156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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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페이지 내용 : 르면 전북은 79,848명, 전남은 114,748명이 강제동원에 희생되었다. 1944년 일제의 침략전쟁 동원을 위하여 징병검사를 받은 전라도인은 전북 14,231명, 전남 23,305명이었다. 4. 일제강점기 전라도인들의 민족운동 가. 1910년대 비밀결사의 조직과 3・1운동의 전개 1910년 8월 한국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이른바 일제의 ‘무 단통치’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전라도에서의 항일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1913년 임병찬이 결성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1912년 이석용이 결성한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 19141915년경 소안도 등 도서 지역 에서 결성된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와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그리고 광복회光復 會 전라도지부 등의 활동을 꼽을 수 있다. 이처럼 1910년대 전라도의 독립운동단체는 의병부대에서 비밀결사로 전환되었으며, 전국적인 통일조직을 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보수적 성 향의 의병계통 비밀결사는 복벽주의復辟主義를 고수한 반면, 혁신유림계가 주 도하는 비밀결사는 공화주의共和主義를 지향하였다. 비록 노선은 달랐지만 구국의 일념은 같았고, 이같은 항일투쟁의 맥락은 3・1운동으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불리는 3・1운동의 불길은 전라도 전 역에서도 타올랐다. 전북에서는 3월 5일 군산, 전남에서는 3월 10일 광주가 그 선구였으며, 시기적으로는 35월에 활발하였다. 특히 종교계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일제의 분석에 따르면 전북은 천도교와 개신교, 전남은 개신 교가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장날을 이용하였다. 전라도에서의 만세시위 건수는 220회 이상이었으며, 연인원은 3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4월 16일 현재 전라도에서의 수감인원은 400여 명이었다. 157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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