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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페이지 내용 : 련을 실시하는 등 청년과 학생들을 동원하였다. 1948년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할 당시에 의원들은 민족적 염원을 담아 헌법 제101조로 ‘8・15 이전의 악질적인 민족 반역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는 특별조항을 삽입하였다. 즉 과거 일제 식민지 시기에 친일행위를 했던 민족반 역자들을 소급 적용하여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었다. 이 조항에 따라 국회는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 반민법 을 제정하고 정부는 9월 22일 법률 제3호 로 공포하였다. 괴청년들이 국회 본회의장에 난입하는 등 갖은 우여곡절 끝 에 반민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정부가 이를 공포함으로써 10월 23일 반민족 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 가 조직되었다. 반민특위는 반민자 대상 7천 여 명에 대한 사전 조사를 진행하고, 이듬해 1월부터 반민족 행위자를 검거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3월 28일부터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전 라도 지역에서도 반민특위 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각종 자료와 구술, 그 리고 투서함 등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친일파들의 조직 적인 저항은 계속되었다. 중앙에서뿐 아니라 각 지역에서도 반민특위 활동을 반대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반민특위는 1949년 6월 6 일 새벽 중부경찰서 서장 윤기병이 인솔하는 일단의 무장경찰대가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함으로써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반민특위 의 활동은 계속되었으나 법이 개정되고 친일민족반역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 루어질 수 없었다. 결국 해결하지 못한 친일파 청산의 과제는 수십 년 뒤에 되 살아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해방 직후 전남의 소작률은 전남이 66%, 전북이 73%에 이를 정 도로 농지소유 문제는 심각하였다.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어 다음 해 4월에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농지개혁의 법제화를 알아차 린 지주들이 사전에 방매함으로써 농지개혁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그럼에도 이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소작관계가 해체되고 자작농체제가 만들어졌다. 그 리고 농촌에서 전반적으로 농업생산력이 향상되고 농지를 방매하고 전환한 새로운 산업자본가 계층이 생겨났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치러진 5・30 선거에서는 무소속이 대거 당선되었으며 제헌의원을 지낸 민주당 인사들이 172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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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페이지 내용 : 대거 낙선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포격과 뒤이은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 로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북한 인민군은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지나 지 않아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뒤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 뒤 북한에서 시행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청년들로부터 시작하여 많 은 사람들을 의용군으로 동원하였다. 또 길어지는 전쟁에 따라 인력뿐 아니 라 각종 물자를 강제 동원하였다. 이런 가운데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게 되 자 북한 인민군을 비롯한 좌익세력은 퇴각하거나 인근의 산악지대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시작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라도 지역은 경찰이 되돌아 오고 이윽고 ‘부역자 처벌’이 전개되었다. 양측의 끝을 오르내리는 ‘톱질전쟁’ 과 2년의 교착된 전선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끝이 났으나 한국 전쟁은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양측의 점령과 뒤이은 학살과 동원, 그리고 휴전 후 남북한 간의 관계는 한반도를 냉전의 경연장으로 만들었다. 한국전 쟁은 총력전인 까닭에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뿐만이 아닌 수많은 비무장 민 간인들도 전쟁의 피해를 떠안았고, 전쟁의 끝난 뒤 수많은 전쟁미망인과 유 가족, 상이용사와 이산가족이 남겨졌다. 한국전쟁은 전선의 후방인 전라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라도는 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예비검속과 수형인을 포함한 민간인 학 살, 그리고 북한 인민군이 점령함으로써 수많은 주민들이 전쟁에 동원되었 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좌익의 학살, 뒤이어 부역자 처벌을 빙자한 민간인 학 살이 이어짐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 각하지 못한 북한 인민군과 좌익세력들이 지리산, 회문산, 백운산 등 인근의 산악지대로 들어감으로써 전라도는 빨치산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부는 빨치산 토벌을 위해 많은 병력을 배치하고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로 인 해 전라도 주민들은 많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이 후 편성되어 후방 지역에서 빨치산 토벌을 담당한 제11사단은 초토화 작전인 청야작전淸野作戰을 전개함으로써 장성, 고창, 정읍, 함평 등 전라도의 많은 지 역에서 수많은 학살이 저질러졌다.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 173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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