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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페이지 내용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 당하고,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에서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직을 승계 하였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1979년 11월 10일 특별 담화를 통해 기 존 유신헌법의 절차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일단 실시하여 공백상태의 대통령 직을 채우겠지만 차기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빠른 시일 내에 헌 법을 개정해 새로 정권을 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최규하는 12월 6일 유신헌 법 절차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최규하는 대 통령으로 선출된 그다음 날인 7일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였고, 나아가 야당 지도자 김대중에 대한 가택 연금도 해제하였다. 비록 계엄령이 지속되는 상 태이기는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계엄령이 곧 해제되고, 새로운 헌법과 민주적 인 정부가 만들어져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4. 한국 민주주의의 심장 그러나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이 곧바로 군사독재정권의 붕괴를 뜻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일부 정치화된 신군부가 존재하였고, 이들은 박 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권력을 장악해 갔다.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 재규를 체포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0・26 사건을 조사하는 합동수사본 부의 책임자가 되어 군 실세로 부각하였다. 그리고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대표이던 신군부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 이었던 정승화를 10・26 사건과 관련이 있다며 대통령의 사전 재가 없이 연행 하는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과 그 추종세력들은 심지어 전방의 제9사 단까지 서울로 동원하여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 군 의 정치개입을 반대하는 군 장성들을 불법 연행하는 등 군사반란을 일으켰 다. 12・12군사반란 직후 전두환을 대표로 하는 신군부는 군 인사를 단행하 며 군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하는 시도를 전개하 180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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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페이지 내용 : 였다. 1980년 초부터 이른바 ‘K-공작’으로 알려진 권력장악 계획을 추진해 갔다. 1980년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였다. 신군부의 움직임과는 달리 ‘긴급조치’로 대표되는 유신독재가 10・26사 건을 계기로 무너져 내리자 국민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 이른 바 ‘민주화의 봄’이 도래하였다. 어떤 지역보다 치열하게 유신독재에 저항하 던 전라도 지역에서도 민주주의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학원에 서, 공장에서, 농촌에서 모두가 자유와 민주주의, 유신독재의 유산을 청산 하려는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군부가 다시 군부통치를 연 장하려고 하자 학생들을 비롯한 국민들은 이것에 대항하는 시위를 전개하였 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국민들의 인권, 기본권, 민주주의를 억눌렀다. 그리하여 언론에는 재갈이 물 려지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대학을 군인들이 점거하였다. 5월 18일 전북 대를 점거하던 도중 공수부대의 폭력 진압이 진행되는 과정에 이세종이 희 생되었다. 5・18민주화운동 기간 최초의 희생자였다. 공수부대원들은 곧바 로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이 학교를 점 거하는 것으로 이세종 죽음의 진상은 이내 덮어졌다. 전북대만이 아니었다. 광주를 점거한 제7공수여단은 전남대와 조선대에서도 전북대에서와 똑같이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며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였다. 1980년 5월 18일 아 침 전남대 정문 앞에서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항의하는 전남대 학생 들의 시위가 발생하였다. 학생들의 시위를 전남대에 주둔한 공수부대원들이 진압하는 것으로부터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날 오전 금남로로 진 출한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김대중 연행’ 소식을 알리 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날 오후 4시경부터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은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광주 시민들은 학생시위에 함 께 항의 시위를 이어 갔고, 계엄군은 국민들을 향해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고 종국에는 총을 쐈다. 군의 발포에 대항하여 5월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이 무 장 저항하자 계엄군은 광주시 외곽으로 물러난 뒤 광주 외곽의 주요 도로를 봉쇄하였다. 계엄군이 물러가자 시민들은 옛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한 공간 181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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