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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페이지 내용 : 화살통, 일본열도 하니와埴輪와 닮은 원통형토기 등 외래요소가 도입되어 고 분에 융합되는 독특한 지역이었다. 이같은 배경은 당시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한성이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사망하는 등 극도로 혼란한 시기의 정치적 상 황에 따른 것이었다. 지역의 유력 수장은 백제의 직・간접적인 영향력에서 이 탈하고 독자화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낸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같은 상황은 일 부 유적에 나타난 일본열도 북부 규슈의 횡혈식석실과의 유사성 및 전방후 원형고분, 즙석분, 원통형토기, 왜계 토기 등 일본열도와 관련된 유구와 유물 이 다수 나타나고 있어서 두 지역 간의 소통을 찾아볼 수 있다. 6세기 중엽 이후에는 반남 지역을 중심으로 존속하던 대형 옹관고분은 급격히 소멸하였다. 이 시기는 백제 성왕대 도읍을 사비로 이전하고 지방정책 을 강화하는 등 백제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시기로 반남고분군에서도 고총 이 사라지고 백제 사비기의 석실로 교체되었다. 이는 토착세력이 자신들의 지 배력을 존속시키기 위해 백제 지방통치체제에 편입하거나 제압되어 백제의 지방귀족화한 것으로 파악된다. 라. 마한 도작문화의 꽃을 피운 광주 신창동 유적 광주 신창동 유적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위치하며 기원전 1세기 를 중심시기로 하는 농경복합유적이다. 유적은 해발 30m 정도의 잔구성 구릉 지대와 그 하부에 형성된 영산강변의 곡간충적지를 배경으로 조성되었다. 신창동 유적은 1963년 기원전 21세기경의 소형 옹관묘 53기가 집단적 으로 조사되면서 학계에 처음 알려졌다. 1992년에 국도 1호선의 개량공사에 따라 국립광주박물관이 긴급조사를 실시한 이후 초기철기시대의 생산 및 생 활, 분묘유구가 결합된 대단위 농경복합유적과 더불어 다양한 유기물이 포함 된 저습지 유적이 드러나자 광주 신창동 유적은 사적 375호 으로 지정되었다. 유적에서는 주거지, 환호, 토기 가마 및 밭 등과 저습지가 확인되었고 무덤은 송국리형토기와 점토대토기가 결합된 이음식 독널로 구성된 집단묘지이며 평 저장경호, 검파두식 〮 철편, 유경식석촉, 숫돌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다양한 목기 및 칠기 등 다 062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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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페이지 내용 : 량의 목제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획기적인 자료는 우리나라 최초로 출토된 경이로운 목제 농경도구이다. 출토 농구는 괭이와 따비, 낫, 자루, 절 굿공이, 방망이 등 비교적 다양한 종류가 있다. 또한 신창동유적에서는 당시 에 행해졌던 것으로 보이는 의례와 관련된 자료가 상당량 포함되어 있다. 이 러한 자료들은 도작농경의 성숙과 함께 등장하여 일상화된 것으로,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다양한 의례행위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들 신창동유적에서 출토된 의례 관련 유물에는 인면문토령, 조형목제품과 멧돼지형토우, 토령, 동탁의 탁설鐸舌 방울 속 소리나게 하는 작은 금속막대 , 동탁형 토제품, 홈이 난 곳 을 술대로 문질러 소리를 내는 악기인 찰음악기擦音樂器, 현악기, 무구형목제 품 등이 있어 비교적 다양한 편이다. 신창동 유적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대규모 벼농사 유적의 확인이었다. 1992년 발굴 시 구릉의 서쪽 사면에서 밭이 확인되었다. 토양분석을 통해서 벼의 규산체가 다량 발견되면서 벼를 재배한 밭임이 밝혀졌다. 광주 신창동 유적의 밭 유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사된 밭 유구로 연구사적 의의뿐 아니라 육도재배의 근거로서 의미가 있다. 이들 벼농사 자료를 살펴보면, Ⅰ 기층의 유기물을 속성으로 하는 벼껍질층, 그리고 부유법에 의해 선별한 탄 화미, 식물 자료의 과학적 분석, 재배경지, 그리고 목제농구 등 다양한 자료 가 발견되었다. 이 중 신창동 저습지유적 벼껍질층에서 산출된 탄화미의 총 량은 500톤으로 우리나라 최대량으로 평가될 만큼 유래가 없을 정도의 탄 화미가 확보되었다. 이같은 엄청난 양의 벼농사 흔적은 신창동유적의 벼농 사의 생산 수준이 상당한 규모의 단계에 진입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 한 막대한 벼생산량과 함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괭이와 따비 등의 기경구 와 낫, 절굿공이 등 수확과 곡물가공을 위한 목제농구가 공반된 점과 다양 한 농경의례관련 자료의 확인도 이 유적의 중요성을 고양시키는 요소이다. 광주 신창동 유적은 최초로 저습지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도된 유 적이라는 점에서 한국고고학의 기념비적인 의의가 있으며 출토된 생활유물 은 그동안 우리나라 고고학의 인식범주를 넘어서는 것들로서 당시의 문화상 과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063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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