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페이지 내용 : 어 달라고 기원하는 신앙 을 연결하여 고구려・신라의 계속된 침략에 국가존망 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익산을 국가중흥의 땅으로 삼아 불국토 로 탈바꿈하려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과 왕비가 미륵삼존의 출현을 계기로 금당과 탑, 회 랑 등을 세 곳에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980년부터 1994년까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미륵사의 배치는 중원과 동・서 삼원으로 3개 사찰이 함께 있 는 구조임이 밝혀졌다. 미륵사 서원에 세워져 있는 미륵사지석탑은 절반 이 상 붕괴되어 6층까지 일부가 남아 있던 것을 1915년 일본인들이 콘크리트 로 보강한 상태였다. 이 석탑은 본래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규모가 장 대하고 석재를 사용하여 목조탑을 표현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의 시원으로서 그 가치가 크다. 미륵사지석탑은 2009년 1월 1층의 제1단 기둥 돌 상면에서 사리를 모신 구멍이 발견되고 내부에서 사리장엄과 봉안기록 등 유물이 발견되어 백제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탑은 2017년 남아 있던 6층까지의 모습으로 재현되었고 곧 개방될 예정이다. 미륵사의 창 건배경은 신라 황룡사皇龍寺의 예를 감안할 때 주변국을 복속시키고 미륵 불 국토를 구현하고자 하는 신앙적인 염원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보인다. 또 무 왕은 현세에서 부처를 돕는 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유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이 익산은 무왕이 이루고자 한 미륵 불국토의 땅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왕은 백제를 불교를 통해 신성국가로 중흥하려 하였고 이를 위해 익산 지역에서 새로운 수도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익산 천 도 문제는 1970년 일본 교토대 마키타 다이료 교수가 찾아낸 ‘관세음응험기 觀世音應驗記’에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되 었다. 그 내용 중에 “백제 무광왕 무왕 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사찰을 만들 었는데 그때가 정관 13년 639년 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치는 비 가 내려 새로 지은 제석정사가 재해를 입어”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지모 밀지’는 『삼국사기』에는 지마마지支馬馬只라고 했는데 이곳이 금마金馬로서 김 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백제 별도로 표현되어 백제 천도설, 별도설, 신도설 등 다양한 입장이 개진되고 있다. 068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역할
71페이지 내용 : 그런데 왕궁유적 등에서 발견된 ‘5부명’ 인장와와 ‘수부首府 수도를 뜻함 명’ 인장와의 존재와 왕궁유적에서 발견된 중국 북조北朝시대에 제작이 유행 했던 청자편의 발견은 왕궁리 유적이 수도의 왕궁이었음을 보여 준다. 결국 600년 무왕이 집권하면서 자신의 출생과 관련 있는 익산 금마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비슷한 시기에 왕궁리 유적에서 보이는 당시의 성벽과 건물터들에 궁궐이나 부속건물을 지어 천도를 위해 새로 도성을 조성하였다. 이같이 백제의 무왕武王은 금마로 왕도를 옮겨 백제의 중흥을 꾀하며 당 시 미래의 구세주 신앙인 미륵신앙을 백제 불교의 주축으로 하고 호국적인 나라의 사찰로 미륵사를 창건하였고, 불교 수호를 자임한 자신의 궁궐의 근 처에는 토착신과 연결되는 제석사를 창건해 왕실의 번창과 국가의 안녕을 기 원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무왕은 익산 지역에 백제를 새롭게 중흥시키기 위 해 수도를 만들어 옮기고 미륵 불국토신앙과 전통신앙을 결합해 백성들에게 새로운 백제의 희망을 제시하였다. 나. 백제부흥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전쟁의 현장 서기 660년 7월 18일 백제는 나・당 연합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수도 사 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전쟁에 패하였다. 당군은 660 년 9월 3일에 백제 왕과 왕족 및 신료 93명과 백성 1만 2000명을 포로로 삼 아 사비 부여 에서 배를 타고 귀환 길에 올랐다. 이때 신라와 당의 급습으로 15일 만에 패한 백제 지역민들은 의자왕과 왕세자 등 왕실과 귀족대신들이 대부분 당나라로 압송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 전쟁이 단순한 백제 공략을 통한 정치적 복속화가 아닌 백제국가의 완전한 붕괴 전쟁이었음을 확실히 깨 닫게 되었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의 ‘대군이 돌아간 후 대군회후大軍廻後 ’에 복 신 등은 곧바로 부흥군을 일으켜 백제부성인 사비성 탈환을 위한 병력 동원 을 취하였던 것이다. 당시 부흥세력은 당나라군이 거의 철수하고 나・당 주둔 군 1만 7000명만이 남은 사비를 포위했다. 9월 23일부터 개시된 부흥세력의 사비성 포위전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이후 백제 각지에서 당과 신 라군에 대한 부흥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069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흐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