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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페이지 내용 : 히 약화되었다. 특히, 진성여왕 때 군대를 파견해 세금을 독촉하자 나라는 전 면적인 내란상태로 들어갔다. 이 같은 난세를 타개하기 위한 영웅 견훤의 출 현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 견훤甄萱의 출생 지역에 대해 2가지 기록이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견훤 은 상주 지방 출신으로 농사일로 어머니가 숲에 잠시 놓아두면 호랑이가 와 서 젖을 먹였다고 하였다. 또 『제왕운기』에는 새가 내려와 감싸주고 호랑이 가 와서 젖을 먹였고 성품은 용맹한 호랑이 웅호雄虎 같다고 하여 신비로움 과 용맹함을 표하였다. 또 군인이 되어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대비하였고, 용기는 항상 군사들 중 첫째였다고 전해져 견훤 출생의 신성함과 용맹스러운 기상을 표현했다. 한편, 『삼국유사』 에서는 견훤이 광주 북촌 부잣집의 딸과 자색옷을 입은 남자로 변한 지렁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이는 견훤이 처음 무진주 광주 를 장악해 토호의 딸과 혼인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특히, 지렁이란 표현은 원래는 백제 무왕처럼 ‘용龍의 자식’으 로 전하다가 후백제가 망한 이후 용 대신 지렁이로 비하되었다고 추정된다. 이같이 견훤은 892년 무진주 광주 에서 성장하여 후백제를 자칭하였고 900년 효공왕 4 완산주 전주 에 이르자 주민이 환영하므로 후백제왕을 자처 하며 본격적인 후백제 역사를 전개하였다. 당시 국가명칭은 ‘백제’였을 가능 성이 높지만 『삼국사기』 등 우리 역사서에 ‘후백제’라 표현하여 ‘후백제’ 명칭 을 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다. 견훤은 전주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고조선-마한-백제로 이어지는 역사 정통성 계승의식을 표명하였다. “우리 역사를 상고하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난 뒤에 혁거세가 발흥하여 진한 신라 , 변한이 이에 따라 일어났다.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 건국 하여 600년이 되었던 바 …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청에 따라 …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제 내가 어찌 완산完山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의 분함을 풀지 아니하랴?”하고 드디어 후백제왕後百濟王을 칭하였다. 『삼국사기』 견훤. 사료에서 ‘마한이 먼저 일어났고 혁거세가 후에 일어났다’는 말은 조선시 074 총설· 전라도의 위상과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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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페이지 내용 : 대 실학자들이 우리 역사의 정통은 고조선-마한으로 연결되었다는 마한정 통론 인식의 원형으로서 이미 견훤이 고조선 준왕의 익산 금마 지역 망명과 이를 이은 마한과 백제 계승이라는 역사인식을 피력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자신이 부활시킨 ‘백제’가 우리 역사의 정통 즉, 고조선-마한을 계승하고 있 음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후삼국시기 후백제가 신라보다 역사 정통성이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전주에 나라의 수도를 정한 역사명분을 제시하여 익산-전주를 하나의 권역으로 파악한 지역인식을 제시하였다. 견훤왕은 전주 천도 이후부터 본격적인 영토확장을 하였다. 후백제의 영 역은 크게 세 방향으로 나뉘어 확장되었다. 그 하나는 후백제의 배후 지역인 서남해 일대이고, 두 번째는 고려와 접경 지역인 한강 상류의 충청도 내륙 지 역이며, 세 번째는 신라와 인접한 낙동강 이동의 경상도 지역이다. 후백제의 판도는 한때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경상도의 서부까 지 손을 뻗쳤었다. 대체로 충청남도의 중부선에서는 태봉泰封과 대치하고 남 쪽에서는 전라남도의 서남부에서 왕건의 수군과 다투고 있었으며, 동쪽에서 는 상주尙州 합천陜川 진주晉州를 잇는 선을 전선으로 하여 한때는 안동安東 영천永川 경주慶州 등지까지 깊숙히 진출하기도 하였다. 한편, 918년 6월 자신보다 10세 연하인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자 공작선 부채 와 지리산 죽전 화살 을 선물로 주며 도량과 배포를 보 여 주었다. 또한 왕건과의 서신교환에서 “나의 바라는 소원은 활을 평양성문 루平壤城門樓에 걸고 나의 말에게 패강浿江 =대동강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고구려 영역을 포함한 후삼국 통일의지를 천명하였다. 특히, 견훤은 신라에 대한 공략을 강화하였는데 920년 1만의 기병을 이 끌고 합천, 초계 지역을 공취하고 925년 12월에는 거창 등 20여 성을 공취하 였고, 이어 927년에는 신라 왕도 경주를 급습하여 당시 신라왕인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옹립하였다. 이때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은 왕건의 원병을 대 구 공산에서 대패시켰는데, 고려장수 8명이 전사하였다 하여 이 산의 이름이 ‘팔공산’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신라왕도를 공략한 견훤은 신라의 보물과 인재를 대거 이끌고 전주로 돌아와 왕도 전주를 새롭게 꾸미게 되었다. 075 제2편· 전라도의 역사적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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